칠장사는 예로부터 깊은 차령산맥이 그 줄기를 품고 있어 고려 말 왜적의 침입이 잦을 때 사서를 칠장사로 옮겨 8년간 비장해 소실을 면한 일이 있다. 칠장사의 묘미는 빛 바랜 단청이 고색창연한 대웅전을 찬찬히 굽어보는 것이다. 새것을 덧씌우는 것만이 아름다움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칠장사 대웅전이 말해준다.
오랜 풍상을 겪은 대웅전은 단청 문양을 세월에 날려보냈지만 힘있게 뻗은 추녀에서 힘찬 자태를 느낄 수 있다. 대웅전의 기풍을 눈여겨 보고 있으면 칠장사의 오랜 역사를 읽을 수 있는 것 같아 자연스레 칠장사에 얽힌 이야기에 귀를 열게 된다. 대웅전 오른쪽 옆에 조각솜씨가 빼어난 석불입상 한 기가 모셔져 있다.

본래 죽산리 봉업사터에 있었던 이 불상은, 절이 폐사되자 죽산중고등학교 교정에까지 흘러갔다. 자연 방치되다가 이곳 칠장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불상은 두광 아래로 발께까지 신광이 표현되어 있고,큼직한 꽃무늬 대좌 위에 모셔져 있다. 불상에 비해 대좌는 풍상의 흔적이 적은 깨끗한 화강암이다. 불상은 특히 얼굴의 눈ㆍ코 부분이 마모가 심하지만 불상을 빚은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다. 오른손을 들어 살포시 가슴에 얹고, 왼손은 차분히 내려 무릎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자태가 일품이다. 어깨에 걸쳐 가슴을 타고 내린 얇은 법의의 선, 3기의 화볼을 인 두광, 그 뒤로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광대의 조각 솜씨가 그 시대의 정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화려한 조각솜씨를 미루어 보면 8세기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우수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고 합니다.


 
 

석남사는 당시 수백인의 참선승이 머물렀던 수행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겹쳐마 맞배지붕으로 단촐하면서도 당당해 보인다. 대웅전 바로 아래 학이 나는 듯한 팔작지붕집이 영산전과 조화를 이루며, 옹기종기 터를 다스린 석남사 경내는 서운산의 풍취에 푹 빠져들게하는 매력이 풍겨난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공포를 갖춘 팔작지붕집이다. 날렵한 지붕끝이 숲속에 살포시 가려있어 단아한 운치를 더한다. 이 건물은 공포의 짜임새가 조선 초기와 중기 사이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신라 문무왕 20년에 고승 담화덕사가 창건했으며 이후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크게 중수했다. 경내에는 16나한이 모셔진 영산전을 비롯해 대웅전, 마애석불 등의 도지정문화재와 석탑, 부도 등 향토유적이 있다.